바람 앞의 등불 | 류향 - 잠자리는 날라감
“나와 한 번 뒹군다면 조건을 생각해 본다고 말했소.”
“미쳤군요.”
“그럼 내가 제정신일 것 같소? 나 같은 용병이?”
그가 앞으로 다가오자 엘레나는 재빨리 말했다.
“협상 자체가 안 되는 사람이었군요.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가레스는 그녀가 정말 돌아가려는 모습에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자리. 그녀는 순수하게 침대만 제공한다는 뜻이었고, 그는 그녀를 제공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그 웃음이 왠지 순진해 보여 엘레나는 그 웃음을 지켜보았다. 생각지도 않은 웃음. 무례하고 제멋대로 착각하는데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한 모습을 지녔는데……. 그런데 짧게 스쳐 간 그 웃음이 이상하게 가슴에 남았다.
가레스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의 변화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여태 자신에게 이렇게 험악한 말을 내뱉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여자가. 저녁 내내 부드럽게 풀어져 빛나던 눈이 지금은 싸늘한 북풍이 감도는 매서운 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도톰하면서도 부드러운 입술. 저 입술의 느낌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을 때 삼켜진 타액은 그의 갈증을 달래는 듯했다. 꿈틀, 그의 거센 욕망이 고동쳤다.
그의 눈빛이 밤하늘보다 더 어둡게 잠겨들었다. 다르긴 다르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협상을 하자고 저렇게 필사적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고. 제 손이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니 그녀의 몸은 아까부터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감지조차 하지 못한 채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그녀가 비틀어 잡아당긴 머리칼도 얼얼하다. 그녀가 물어뜯은 입술도 얼얼하긴 마찬가지다. 사나운 여자군, 정말. 길들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할 것 같은데…….
그때 그녀가 문고리를 돌리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가 만든 치료제는 상급이에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아예 없어 보였다.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니 제 행동을 뉘우칠 리 없었다. 저런 놈에게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도도하게 고개를 세우고 허리를 쭉 폈다. 그가 찢어 낸 앞섶을 한 손으로 누르고 그녀는 오만하게 문밖으로 나갔다. 도망치듯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이 있지 저런 남자에게 기가 눌리진 않을 것이다. 여태 성과 영지를 관리했던 그녀의 침착함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잘 감추는 법. 인내하는 법. 현명하게 제 공포를 숨기는 법. 그것이 지금까지 엘레나가 터득해 온 것들이었다.
바람 앞의 등불 | 류향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211030063
------------------♡♡♡♡
류향님을 가장 먼저 알린 책이던가? 넘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 가물... 다시 읽어 봐야 겠어요. 당찬 여주 멋짐. 어리고 예쁘기만한 여주들을 한껏 비웃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