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야, 나는......"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유나처럼 대해 달라는 것도 아니다. 엄마가 후회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알아줬으면 좋겠어."
엄마와 아빠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는 걸.
차는 매끄럽게 도로를 빠져나가 매운 갈비찜 전문점 앞에 섰다. 차호수 본인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매운 갈비찜을 3인분이나 주문하고 2인분은 따로 포장까지 해서 내게 들려 주었다. 마치 서러움에 대한 보상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내게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물었다.
"집으로 갈까?"
"응."
차는 곧장 익숙한 길을 달렸다. 집은 차호수의 오피스텔을 뜻한다. 위치는 우리 집에서 고작 다섯 블록 떨어진 곳. 내가 아르바이트를 일찍 끝내고 놀러 가면 그는 늘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하다가 고개만 겨우 들고 인사하곤 했다. 마치 정신병원에 있던 그 컨테이너를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피스텔로 놀러와 차호수의 냄새가 듬뚝 든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했다. 그가 머문 자리는 한여름에도 박하 향처럼 시원하고 서늘함을 머금었다.
"그래서 다슬이가 뭐라고 했냐면......"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할 때, 차호수는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해 있었다.
"내 말 듣고 있어?"
약간 심통 난 목소리로 묻자, 그는 차분하게 입만 달싹이며 대답했다.
"다슬이."
"다슬이가 뭐 했는데."
"계산 미스."
듣고 있던 건 확실하다. 보통 천재들은 멀티플레이가 잘 안된다던데, 차호수의 귀는 항상 잘 열려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집을 한 번 더 두루 살폈다. 회색 벽지에 흰 소파, 시계, 드레스 룸, 침실, 냉장고는 더 단출하다. 물과 약간의 포장 음식, 내게 줄 케이크.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그의 성격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공간이다. 쓸모없는 건 아예 곁에 두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다시 침실로 돌아와 차호수에게 말했다.
"오빠, 일 그만하고 나랑 놀자."
"이것만 하고."
여자 친구에게 너무 냉정한 태도 아닌가. 나는 슬며시 그의 옆으로 다가가 목덜미를 주물러 주며 물었다.
"뭐 하는 건데?"
"자문해 주느라고. 귀찮아서 미루다가 지금 막 시작했어."
"아하."
셔츠 목깃 아래 흰 목덜미는 아주 부드럽고 투박했다. 매끄러운 피부를 따라가다가 보면 툭 불거져 있는 목젖과 단단한 승모근을 느낄 수 있었다. 손끝이 그의 피부 결을 검질기게 쓸었다.
"무슨 자문인데?"
목을 꺼안고 밀착하며 묻자, 그는 내가 앉을 수 있도록 뼏었던 다리의 무릎을 평평하게 세워 주었다. 사양할 거 없었다.
"SF 영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모험이래."
"정말? 나 SF영화 좋아해! 우와...... 완성되면 꼭 보여 줘. 보고 싶다."
무릎에 가뿐히 올라앉아 잘생긴 콧잔등과 매끈한 피부를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하릴없이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목덜미에 감았던 팔 한쪽을 내려 두 갈래 근육으로 갈리진 허리 계곡을 끈적하게 쓸었다. 처음으로 커다란 몸이 움찔 떨렸다.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담갈색 논동자를 모른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차호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잠깐만, 이것 좀 끝내고 놀아 줄게."
"응. 천천히 해."
착하게 대답하고서 그의 등줄기를 쓸다가 웃옷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차갑고 단단한 그의 몸에서 서서히 열기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희수야."
"응? 왜? 화났어?"
"아냐, 됐다."
짧은 숨을 토하며 그는 마저 화면에 집중했다. 타자 치는 손이 빨라진다. 그는 중간에 끊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근성이겠지. 하지만 요즈음 내 인내심은 짧았다. 병원에서 나온 이후로 그렇게 됐다.
"심심하단 말이야."
그의 목덜미를 힘껏 껴안으며 바짝 가슴을 밀착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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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배경에서 여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밤을 새게 만들 만큼 흥미롭다. 약간 모자란듯한 순진한듯한 여주는 사랑스럽고 아픔을 극복하는 남주도 멋있다. 필력도 좋으시고 철학과 우주에 대한 지식도 많으신 연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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