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이라도 네가 마음을 바꾼다면 숨겨 줄 수 있어.”
“나를?”
그녀가 원한다면 누구도 찾지 못하도록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겨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반의 말에 린이 피식 웃었다. 메마른 붉은 입술이 희미하게 호선을 긋자 블랙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그런 호의는 필요 없어.”
린이 거절했는데도 에반은 대답 없이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침체된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블랙.”
린은 여전히 에반을 블랙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쉿.”
에반이 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생각 중이니까 조용히 해.”
린의 대답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에반이 짧게 말했다.
“무슨 생각?”
“첫 번째.”
에반의 얼굴이 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가 앉아 있는 흔들의자를 짚고 있는 강인한 두 손이 금방이라도 린을 붙잡을 것만 같았다.
“널 이대로 끌고 안전 가옥으로 가느냐.”
“뭐?”
“하지만 그건 기각. 분명 넌 그 집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을 때려눕히고 나올 테니까. 그럼, 두 번째.”
린의 의사는 철저하게 에반의 생각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감옥에 가둘까.”
농담이 아니었다.
“이 아래는 성답게 지하 감옥도 잘 구비되어 있거든.”
그의 손이 의자의 팔걸이를 벗어나 바닥을 두어 번 툭툭 쳤다.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농담의 빛은 찾을 수 없었다.
먼저 치는 게 나을까? 금방이라도 에반은 자신이 말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 그녀를 공격할 것만 같았다. 린이 그 생각을 한 순간, 침체되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걱정 마. 그러진 않을 테니까.”
서서히 그녀에게서 떨어진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긴 그림자가 린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등을 보인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브랜디 병을 들어 보였다.
“한 잔?”
“차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잔에 브랜디를 채운 에반이 잔을 돌리자 그 속을 채운 브랜디가 출렁이며 부드럽게 그의 손바닥 전체를 훑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손바닥 온기에 적당히, 먹기 좋을 정도로 데워진 것을 린에게 내밀었다. 다시 거절하려던 린이 결국 그 잔을 받아 들었다. 건네진 잔에 에반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카인 의원은 당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 거지?”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아.”
달콤하고 그윽한 향이 코를 찔렀다. 에반이 린을 향해 잔을 한 번 들어 보이곤 단숨에 비워 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냐?”
허를 찌르는 린의 말에 에반의 깊은 눈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곤 린도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이 달큼한 향은 브랜디 특유의 향이었다. 목을 넘어갈 땐 뜨겁고 강렬하지만 뒷맛은 부드러웠다. 그가 비어 있는 린의 잔에 다시 브랜디를 따랐다. 그리고 병을 내려놓곤 린의 입가에 묻어 있는 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아버지를 죽인 자는 군인이었어.”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의 옆에 오래 서 있었던 군화였다. 존재를 알 수 없는 원수는 마치 뱀과 같은 자였다. 지금껏 자신을 내보이지 않았던 자가 이제 와서 꼬리를 밟힐 짓을 하지 않으리란 건 에반도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알아. 그래서 나도, 너도 지금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정계에 뛰어들어 정치를 시작한 카인 의원을 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냐.”
그는 한스 대령의 이상,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자였다. 정치를 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군인이었던 그가 정치를 시작한 발판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한 에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사(流砂: 모래늪)를 본 적 있어?”
불현듯 물어 오는 그 음성에 린이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잭이 사막의 유사를 잘못 디뎌 정말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메마른 사막에서 그보다 더 버석하게 메말라 누군가 발만 디뎌 주길 바라고 있다. 발을 디디는 순간 단번에 집어삼키기만을.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이 린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넌 너무 건조해.”
그의 낮은 목소리에 웃음기가 돌았다.
한 번 빠지면 흔적도 없이 통째로 사막의 모래 깊은 곳까지 사람을 끌고 들어가 버리는 그 죽음의 구덩이를 에반이 말하고 있었다. 그 구덩이가 마치 린, 자신 같다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에반의 말처럼 자신은 유사와 같을지도 몰랐다. 메마른 가슴은 누군가 주먹으로 치면 흔적도 없이 부스러질지도 몰랐다. 린도, 그 가슴을 친 사람도 모두 흔적 하나 남김없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항상 불행해졌다. 그녀에게 붙어 있는 불행이 마치 주변 사람을 전염시키는 것만 같았다. 사막의 유사처럼, 자신에게 온 모든 이들을 불행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는 존재인 걸까.
그것을 깨달은 린이 여전히 결여되고 메마른 눈빛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어 잔을 잡고 있는 린의 손을 단호히 붙잡았다.
“나를 집어삼켜도 돼.”
기꺼이 사구로 한 발 내디디며 그가 말했다.
“……무섭지 않아?”
불쑥 린이 물었다. 그의 말뜻을 생각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전혀.”
짧고 간결하게 에반이 대답했다.
그 목소리엔 더 이상 웃음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에반의 입술이 린에게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녀가 물러날 곳은 없었다. 숨이 닿을 만큼, 그가 내뱉는 숨결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만큼 가까워졌을 때, 매끄러운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대신 나만 삼켜야 해. 네가 끌고 들어갈 사람은 나뿐이야.”
블랙레이디 (Black Lady)1 | 김신형(하현달) 저
https://ridibooks.com/books/120005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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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탄탄. 흥미진진. 작가님이 아프카니스탄에서 근무하신게 아닐까 물어보고 싶을 만큼 전문적임.
#아프카니스탄 #능력남주 #걸크러쉬 #전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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