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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율도 (律道) /소낙연(笑樂緣)

by 럽판타지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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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거든 가거라.”
문득 등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도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언제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왔을까. 기척도 없이 다가온 사내가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잡고 있었다. 율도는 반사적으로 말을 뱉었다.
“일이…… 많이 바쁩니다.”
“금방 질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았느냐.”
“제가……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까.”
“붉은 노을.”
귤은 망설임 하나 없이 단정적으로 답해 왔다. 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자가 그것을 어찌 알았을까. 설마 그날 바로 눈치를 챈 걸까. 만만치 않은 자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감추었던 두려움까지 그리 단숨에 알아차렸을 줄은 몰랐다.
흠칫하는 마음에 율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빛을 쏟아 내는 하늘도, 풀밭도 모두 붉었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의 날카로운 얼굴도.
그리고 오늘 또한 그녀는 멀쩡했다. 세상을 온통 물들인 붉은빛 속에서도.
그날도, 오늘도 우연일 리가 없었다.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벗이라는 이 사내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함께 있어 줄 터이니 잠시 더 있다 가거라. 모른 척해도 상관없으니.”
사내가 피로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공허한 눈길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뚝뚝한 그 한마디가 가슴속 깊은 어딘가를 크게 건드려 왔다.
“공자님과는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뺨을 타고 흐르는 뜨끈한 물기가 느껴졌다. 이유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율도는 당황하고 말았다. 왜 이러지. 대체 왜 이러지.
“그래, 상관없지. 허니 너도 신경 쓰지 말거라.”
조용히 답한 사내가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얼굴을 살피는 눈길은 날카로웠지만, 이상하게도 천천히 움직이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래서 그 손을 쳐 내지도 못했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어떻게 해도 멈춰지지 않았다. 가슴에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미미한 죄책감 같은 것도 함께 일었다. 말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자도 덜 아프지 않을까.
“기억을…… 잃었습니다.”
결국 저도 모르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7년 전에 큰 사고가 있어서…… 죽다 살아난 이후로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사고……. 붉은 안개를 말하는 것이더냐.”
사내는 몹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바로 그것을 집어냈다. 붉은 안개. 뜻밖의 말에 율도는 흠칫 놀랐다.
“어, 어떻게…….”
“그날 나도 너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몇 달은 붉은 것을 쳐다보지 못했다.”
담담한 목소리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모두 이해한다는 눈빛에 더욱 눈물이 났다. 그녀의 눈가를 매만지던 사내가 머리 뒤로 손을 뻗어 불쑥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파묻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율도는 참았던 오열을 크게 쏟아 내고 말았다.
그 끔찍한 순간에 함께였다. 이 사람이 함께였었다. 어찌 그런 벗을 잊었을까. 어떻게 알아보지도 못하였을까.
“밉지…… 않으십니까.”
“뭐가 말이냐.”
“벗이었다면서 저는 하나 기억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아니, 기쁘다.”
기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말이 심장을 크게 울렸다.
“무슨…… 뜻입니까.”
“죽도록 기쁘다. 네가 살아 있어서.”
“……바보 같습니다.”
“처음부터 네겐 바보였다. 너는 기억도 못 하겠지만.”
사내가 더욱 깊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 바보 같은 사내가 불쌍해서, 스스로가 한심해서 자꾸 눈물이 났다.
노을이 사라진 자리에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미 붉은빛은 사라진 지 한참이었지만, 귤은 오래도록 그녀를 놓지 않았다.

합본 | 율도 (律道) (전4권/완결)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2093019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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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옷소매 붉은 끝동도 드라마로 만들어 지는데..읽고 또읽고 또 읽을 수도 있는 몇 안되는 소설이다.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넘 판타지 스러워서인가? 남장여자 소설의 전형이면서 성종과 숙의 홍씨의 사랑을 아름답기도 하고 가슴저리기도 하게 풀어낸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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