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사람들 틈바구니를 벗어난 뒤에야 겨우 심호흡을 하던 은기는 문득 등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잠긴 강조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파도가 치는 소리와 밤바다의 풍경을 배경으로 선 그를 마주하자 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제가 했던 어처구니없는 오해도.
줄줄이 기억들이 이어져 그녀는 머리를 털어내며 이마를 짚었다.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강조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이러고도 우진이랑…….”
“그만해요.”
“저런 박현중이 좋았단 말이지?”
“그만하라고.”
놀리는 듯한 말에 뾰족하게 눈을 치뜨자 강조가 피식 웃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 같아 은기는 괜스레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요.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만 잘 띄는 게 아닌가 봐.”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하는 말에 “응?” 하고 되물었지만 그는 눈썹만 까닥일 뿐이었다. 여전히 쏟아지는 시선에 어색하게 눈을 굴리던 은기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근데 아까 그건 뭐예요? 예술을 동경하고 사랑하는 마음? 인홍 그룹 사업 방향이 언제부터 바뀌었나?”
“높으신 분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잖아.”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강조가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그게 이 자리에 앉아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 아니겠어?”
저 만사가 당연하다는 듯한 자만감이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실소를 흘리며 은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한다고? 관심이 생겨서?”
“인홍은 늘 준비가 되어 있었어. 이끌고 갈 동력이 없었을 뿐. 이제 계기를 찾았다고 해두지.”
……그 계기가 나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묘하게 느껴지는 부담감에 바닷바람이 서늘하게 목덜미를 쓸고 간다. 목을 움츠리고 팔짱을 낀 은기가 중얼거렸다.
“뭐, 우리나라 예술 사업의 미래를 생각하면 다행인 일…….”
갑자기 훌쩍 가까워지는 그림자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함께 어깨에 묵직함과 온기가 내려앉는다. 가까이 다가온 강조가 그녀에게 둘러준 재킷 앞섶을 매만지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낮게 내리깔고 있던 눈을 올린다.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이 작게 쿵, 하고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올라가서 차 한잔할까?”
나른한 목소리가 유혹처럼 다가온다. 마른침을 삼킨 은기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됐어요. 짐부터 뺄 거니까.”
우진에서 잡아준 방이니 그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내일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으니 오늘 하루만 지낼 방을 구하면 될 일이다. 그녀의 말에 눈썹을 들썩인 강조가 곧장 받아쳤다.
“잘됐네. 내 옆방이 빈 것 같던데.”
“난 오늘 잠만 자면 되는데 내가 왜 스위트를……. 혹시 류 선생님이랑 인사했어요?”
이 호텔에는 최상급 스위트룸이 세 개밖에 없다. 설마 하는 마음에 묻자 강조가 고개를 주억였다.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하시던데. ‘앨리 서’를.”
은기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어느 틈에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인목은 전부터 우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인홍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정말 그렇게 말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강조는 태연하게 턱을 어루만졌다.
“알겠지만 우린 류 선생님의 말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라. 싫어도 내 말에 따라줘야겠어. 가서 짐부터 옮기지.”
“언제부터 선생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이봐요, 이강조 씨.”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그를 부르자 강조가 선뜻 돌아선다. 날카로운 듯 보이는 표정에 너무 함부로 불렀나 싶어 멈칫하던 은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내내 날렵한 선을 그리고 있던 강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임파스토(Impasto) 3권 | 우지혜 저
https://ridibooks.com/books/29705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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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묻따 구매, 10시에 시작해서 다음 날 6시까지 정독, 어디 겁도없이 평일에 우지혜님 신작을 건드리냐?. 다른 작품에 비해 장편이고 글자수 대비 살짝 비싸기는 한데, 네 권 당연히 다 읽게 된다. 작가님 냄새가 물씬 나는것은 최근 작품에 자주 나오는 서핑 배경과 꼭 등장하는 스토커! 당언히 남여주인공은 저세상 미모에 전문직. 그래도 다양한 직업에 디테일이 뛰어나서 정성 많이 들이시고 공부 많이 하시는 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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