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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꽃은 꽃으로, 잎은 잎으로/우지혜 - 네 꿈을 보았으니 이번엔 내 꿈을 보여 주지

by 럽판타지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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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대로 되었군, 고생이 많았을텐데 그만 들어가도 좋네. 안색이 좋지 않군."
"저는 괜찮......"
고개를 내젓던 설영은 손간 제 뒤에서 성큼 걸어 나오는 명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차고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시선은 정확히 교우에서 붙들린 휘요에게 향해 있었다. 설영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명왕의 소매를 붙들었다.
"전하, 어딜 가십니까?"
순간 현기증이 일어 그녀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냉랭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명왕의 눈매가 이그러졌다. 그는 단숨에 다가와 주저않으려는 설영을 부축했다.
"괜찮으냐?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기침이 튀어나와 면포를 움켜쥐던 설영은 순간 흠칫 놀랐다. 오래도록 내리는 비의 습기를 흠뻑 머금어 물러진 반죽이 그녀의 손아귀에 한 움큼 떨어져 나온 것이다. 잇속으로 당혹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설영은 눈을 깜박였다.
입을 틀어막은 채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 설영의 기색을 눈치챈 명왕은 서슴없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열이 심하질 않느냐! 이 몸으로 여태 찬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단 말인가?"
"아닙니다. 이건 덧옷을 입고 있어 몸이 더워져서 그런......"
"되도 않는 변명은 집어치워라. 내 너를 모르는 바 아니니."
설영을 쏘아보는 명왕의 눈빛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설영은 입을 틀어막은 채 흐릿한 눈을 깜빡였다. 산발적인 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발밑이 꺼지는 것처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녀는 제 등을 감싼 채 반쯤 품에 안기다시피 하고 있는 명왕의 가슴을 작게 밀었다. 그 말에 도리어 질게 뻗은 눈썹을 반항적으로 세운 명왕은 그녀를 안은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가까이에서 비로소 마주본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거친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타는 듯한 눈으로 반쯤 감긴 눈을 힘겹게 깜빡이는 설영을 응시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너를 찾았는데, 기껏 한다는 말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이냐?"
명왕의 단려한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과연 무정한 너답구나."
"......저는."
머릿속이 아찔하다. 지친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던 의지가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사라지자, 그 빈자리를 채우며 온몸에 열기가 번지는 것 같았다. 버텨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지만 쉽지 않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명왕의 눈이 다정한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정은 주는 것이 아니라 했었지."
뜨끈한 설영의 몸을 어루만지며 명왕이 속삭였다.
"네 입으로 뱉은 말이니,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열기에 떠밀려 나온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있던 설영의 눈이 결국 까무룩 감겼다. 명왕은 그녀를 깊이 품에 안았다. 가냘프고 여린 몸이 불덩어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설영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
포근하고 따스하다. 해먹에 드러누워 기분 좋은 진동에 맞춰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절로 마음이 간지러워진다. 설영은 느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어깨를 감싸 안는 손길이 있었다. 어떤 목적이 있는 손길은 아니었다. 그저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타닥이는 느낌이었다. 괜한 생각은 할 것 없다고 조용히 타이르는 듯한 그 든든한 손길에, 설영은 깊이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먼저 느껴진 것은 그리운 향기와 코끝을 스치는 열기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몸의 신경이 천천히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다. 날이 밝은지 한참 되었는지 눈이 부셔 설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마지막 기억을 뒤새겨 보려 노력하며 설영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자 비로소 눈앞의 것이 뚜렷하게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남자의 가슴이었다.
얇은 황동색의 비단옷 사이로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가슴이 드러나 있다. 설영은 멍한 기분으로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저를 향해 비스듬히 틀어져 있는 너른 어깨와 목선을 따라 올라가자 굳게 다물린 입술이 보였다. 그 순간 설영은 이것이 꿈이라고 판단했다.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아니면 피곤했었던 것인지 그녀의 머리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 기억이 무엇이었는지를 아직도 길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설영은 그저 막연히, 침의를 입은 명왕의 품에 안겨있으니 꿈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런 꿈이라면 몇 번쯤 꿔본 적이 있었으니까.
짧게 숨을 고르며 설영은 손을 올려 명왕의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감촉이 생생하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갑작스레 벅찬 기분이 몰려온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팔을 뻗어 명왕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코끝이 그의 가슴에 짓눌렀지만 설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뛴다.
처음 이 낯선 땅에 떨어지자마자 예화의 앞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병약해진 제 몸을 땀으로 묻어 버릴 것처럼 무겁던 외투를 덮어주며 소년처럼 웃는 그를 보았을 때처럼.
"무진."
설영은 그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그의 맨살에 부딪친다. 왠지 모르게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라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조금 더 명왕의 가숨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순간 위로 들어 올린 명왕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감쌌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체온이 높은 명왕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설영은 그의 손을 따라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버려진 명왕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나를 보고, 다시 불러 보아라."
깨어 있었을까. 언제부터 깨어 있었을까? 아니, 깨어 있었다는 게 중요할까. 아차피 이것은 꿈이 아니던가.
옅은 위화감이 안개처럼 발목 근처를 아슬렁거렸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간절하다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타는 듯한 시선으로. 명왕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설영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꿈에서까지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강요하진 말아요. 나한테는 항상, 그냥 무진이었으니까."
"......꿈?"
그녀의 말을 따라 하듯 명왕이 단려한 입술을 움직였다. 미간을 좁히는 그의 눈가에는 피로와 닮은 어둠이 베어 있었다. 설은은 꼼지락거리며 손을 뻗어 그의 눈꺼플을 어루만졌다. 명왕은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잠자코 눈을 감았다.
반듯하게 뻗은 이마와 높다란 콧대, 남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완고한 턱을 차례로 손으로 더듬자 명왕의 미간 주름이 점점 깊어진다.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슬쩍 한쪽 눈을 뜬 명왕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하게 해주마."
낮게 중엉거리며 그는 몰아 쥔 그녀의 손가락 위에 입을 맞쳤다. 그가 뺕어 내는 뜨거운 숨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힌다. 설영은 고요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명황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내 곁에 있어라. 영아."
명료한 그의 목소리가 눈꺼플에 내려앉는다. 웃고 싶기도, 울고 싶기도 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설영은 두 어 번 눈을 깜박였다. 가슴 언저리가 저릿, 하고 울려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쇳소리를 닮은 그녀의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없었던 적이 있었나요?"
설영은 반문을 제기하듯 잘생긴 눈썹을 삐딱하게 모으는 명왕의 뺨을 감싸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입술이 부딪치자 놀랐는지 굳게 입을 다문 것은 명왕 쪽이었다. 설영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틀어 그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그녀의 여유는 거기까지였다.
등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명왕의 손에 두 입술이 빈틈없이 맞부딪쳤다.
......."네 마음은 이미 들켰으니 더는 숨기려 하지 말아라."
"......꿈결에 뭔들 못하겠습니까?"
퉁명스럽지만 물기가 베어 있는 말투는 온전히 설영의 것이었다. 명왕은 눈을 감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어서 눈감고 다시 잠을 청해라. 네 꿈을 보았으니 이번엔 내 꿈을 보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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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소설이기는 한데, 우지혜님 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해야합니다. 동양풍 서양풍 다 되시는 분이심. 차원이동, 출생의 비밀, 숨기고 또 숨기고 지략에 뛰어난 여주도 멋지고 남조때문에 게시판 난리 났지만, 난 언제나 명왕파라서 무조건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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