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개, 맞죠?”
시종일관 그를 몰아붙였던 그녀의 얼굴에 일순 두려움이 밀려든다. 서하현은 그제야 제가 깨트린 그릇이 무엇인지 뚜렷이 목격한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믿음을 깨트렸다. 그리고 의심과 불신을 주었다.
벼락처럼 꽂혀 드는 통찰에 서하현은 얼굴 한쪽을 거칠게 문질렀다. 어떤 일은 시작과 함께 끝이 정해진다. 공은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때부터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 속임수의 여파가 누구에게 더 큰 충격을 줄지는 퍽 명백했다는 거다.
그런데 막상 상처를 받은 듯한 공은길을 보자 서하현은 속이 그대로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타격이었으며, 내부가 홧홧하게 타들어 갈 정도의 부상이었다.
피하고 싶어서, 그러나 피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아서. 그답지 않게 무작정 덮어 두었다. 그렇다고 저지른 짓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애송이처럼 아둔한 판단이었다.
“…….”
서하현은 의연한 척 굴지만,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은길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젠 합리화도 끝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웃기지도 않게 겁을 먹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때의 나를 한 대 치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공은길은 대충 넘기고 적당히 무마해도 되는 그런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상처받지 말아요. 공 선수 이용하려다 이쪽은 약도 없는 부작용에 시달리는 중이니까. 이왕이면 쌤통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어 줘요.”
“…….”
“그리고 사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뭐를 알았다는 거예요?”
긴장한 듯 창백해지는 남자의 낯빛에 은길의 떨림은 외려 멎어 갔다.
“네 앞에만 서면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어져.”
“……!”
은길은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를 삼켰다. 목구멍 어딘가가 얼얼하리만치 아팠다.
“네가 내 아내가 되고, 내가 이렇게 행복해질 줄 알았으면, 개수작은 집어치우고 진작 데려왔지. 진작…….”
그가 인상을 쓰며 은길을 당겨 안았다. 다소 멍한 몸은 남자의 품으로 쉽게 딸려 왔다. 서하현은 그녀의 정수리에 연거푸 입을 맞추며 아프게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내가 개자식이라서.”
“거기까지 내려가는 거예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를 듣자 서하현은 조금이나마 숨이 트이는 듯했다. 그는 은길을 더욱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못 돼 처먹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착하고 바른 남자가 못 돼서. 흉내 낸다 한들 꿰맨 자국만 두드러져서.”
“…….”
“불안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은길은 익숙한 체취를 맡으며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서하현은 괘씸했지만 그의 진심은 뜨거웠다. 그의 의도와 사랑이 별개의 일이었듯 은길도 마찬가지였다. 서하현은 미웠으나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금이 간 틈새를 정확히 메꿔 주는 고백에 얼어붙은 몸도 풀려갔다.
“……서하현 씨가 개자식은 맞는데, 그래도 아이디어는 좋았어요. 확실히 나를 이용하는 게 득점률이 좋죠.”
“그래도 공 선수가 배구하는 데에는 차질 없도록 처리할 겁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게 해 줄게요.”
잘 나가다가 또 이런다.
“난 윈드마커 소속으로 배구하고 싶어요.”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대단할 것 하나 없는 그 엉망인 팀이 좋으니까.”
은길은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난공블락 로맨스 3권 | 건어물녀 저
https://ridibooks.com/books/304901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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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고구마 따위로 지면을 낭비하지 않는다. 오해로 인한 갈등 없다. 정신 산만한 명랑만화 속 주인공들의 19금 성장스토리. 센스있고 찰진 대화. 신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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