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부터 말려둔 원고를 거둬들이며 그의 행색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장 씨가 결국 입을 열었다.
“다희가 혼인한다고 하니 마음이 허하슈?”
움찔.
대답은 안 했지만 흠칫 놀라는 그의 반응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쯧쯧, 크게 혀를 찬 장 씨가 원고를 연상 한편으로 미뤄두더니 담배통에 불을 댕겼다. 자칫 원고에 불이 붙을까 두려워 운이 항상 질색하는 짓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운은 타박도 않고 그저 외면할 뿐이다.
“동생을 보내는 심경인 게지.”
침묵이 얼마나 지났을까. 장 씨가 뻐끔뻐끔 피우던 담배도 거의 다 타갈 무렵에야 비로소 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퍽이나.”
역시나 말 한마디로 운을 후려갈기는 장 씨다.
다시 침묵이 계속됐다. 장 씨가 담배통에 다시 연초를 채우고 불을 댕겼고, 한동안 작업실엔 화향 짙은 봄바람과 담배 연기만 가득 찼다.
조로롱조로롱, 어디서 밤새가 운다. 그립다는 말을 못하고, 님 곁을 맴돌며 새 울음만 보내느니.
“다희가 사랑스럽다 하지 않았소?”
역시나 묵묵부답. 하지만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운이 쾌가를 시작한 이래로 근 3년 가까이 그의 곁을 지킨 장 씨다. 바담 풍, 이 빠진 소리를 해도 바람 풍으로 알아듣는 경지가 된 지 오래다.
“그럼 걸릴 게 뭐요? 다희도 나리를 연모하겠다, 나리도 그 아이 싫지 않겠다, 그냥 오 씨 부인더러 달라 해서 같이 데리고 살면 되지 않소. 그게 어렵다 싶으면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품기라도 하던가.”
“혼사 앞둔 아이에게 일생 지고 갈 짐을 안겨도 된다는 겐가?”
침묵을 지키던 운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뜨악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장 씨의 시선엔 의구심이 서려 있다. 운이 언제부터 그리 배려심 넘치는 위인이었단 말인가.
“답답해서 그러지 않소. 내가 다희 그 애가 여종이라고 무시해서 그러는 게 아니유. 그 애가 하도 나리 향해 애달파하니까 안타까워 그러지 않소.”
“…….”
“내 딸년같이 여기는 아이요. 나도 그 애가 어여쁘고 귀엽다 이 말이오. 그런 아이가 나리가 한 번 돌아만 봐주기를 그리 바라잖소. 그리고 나리도 그 애가 좋다면 굳이 못 품을 이유가 뭐요. 남의 집 종이라 그렇소? 아닌 말로다가 저 쾌가 구석에 꽂힌 비서 몇 권만 팔아도 다희를 사올 수 있을 거요. 추리설의 작가 비영인데 그만한 돈을 낼 재량도 없소?”
장 씨의 말마따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혼사를 훼방 놓는 게 꺼림칙하긴 하지만, 만약 다희를 데려오려 들면 그녀부터 좋아서 펄쩍 뛸 것이다. 그녀를 얻고, 비영을 얻고, 추리설도 얻고. 일석삼조의 대책.
다희의 마음을 안다. 그리고 그도 그런 다희가 좋았다. 그러나…….
“좋으면 그냥 덥석 품어도 된다던가?”
“그건 또 뭔 소리요?”
불쑥 쏟아낸 말에 장 씨의 눈이 둥그레졌다. 얼굴도 보지 않고 혼인해 사는 부부가 어디 한둘인가. 심지어 서로 좋아하기까지 한다면 같이 살지 못할 이유가 무엔가.
다희를 예뻐하긴 하지만 어차피 노비. 정식 혼인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첩으로라도 데리고 살면 더 바랄 게 없다 생각하는 건 신분제 사회의 굴레 안에 있는 장 씨의 한계였다.
그러나 운은 그렇지 않은 게 문제였다.
“마음이 동하면 자고, 좋다는 이유 하나로 멋대로 제 운명에 여인들을 끌어들이고, 그러다 일이 터지면 나 몰라라 도망을 가고. 난 사내들의 그런 방약무도함이 아주 싫네.”
잘라 말한 운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니 휘청 다리가 흔들렸다.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몸을 가눈 운이 작업장 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나갔다.
완월 (玩月) 1 | 정은숙 저
https://ridibooks.com/books/120028709
----------------------------
이런 소설은 어떻게 적는지 신기함. 소설안에 소설작가가 있고 그 소설이 실화가 되는. 현실과 비현실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균형을 이룬다. 또 다희의 성장소설이고 최운은 21세기적 남녀평등 마인드를 가진 팔방미인.
'픽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열 | 정은숙 저 - 여지는 천상 여자 (0) | 2022.12.20 |
---|---|
칸과 나 | 정은숙 저 - 주말드라마 신파? (0) | 2022.12.17 |
차이역 | 교결 저 - 무섭고 두렵고 불친절한데 끌리는 남자 (0) | 2022.12.13 |
월, 광(月, 狂) | 김빠 저 - 긴장감 텐션 배덕 (0) | 2022.12.13 |
손님 | 류도하 저 - 바보와 왕을 넘나드는 남주의 현란함 (0) | 2022.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