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실 쪽이 아닌 거실 쪽 화장실이었다. 혜린은 뒤늦게 그가 샤워 중이어서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걱정이 앞서 상상이 너무 과도했던 모양이었다. 괜히 샤워 중에 기척을 느끼고 놀랄까 싶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식탁 위에 숙취 해소 음료와 짜 먹는 약, 알약, 환 등 전부 올려 두곤, 이대로 가면 그가 의아할까 해서 그 자리에서 문자도 남겨 두었다.
[숙취해소제 두고 갑니다. 드시고 주무시길 :)]
그렇게 문자를 보낸 혜린이 흘끔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1분, 아직 그의 생일이었다. 고민하던 혜린이 연이어 화면을 두드렸다.
[생일 축하해!]
이게 뭐 별거라고 그렇게 고민했던 걸까. 보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한 느낌이었다. 그의 행방도 확인했겠다, 약도 전달했겠다, 계획했던 일을 끝낸 혜린이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그때, 소파에 놓인 재윤의 핸드폰이 보였다. 그렇다는 건 샤워 중이라 제대로 말을 못 한 게 아니라, 그만큼 취해서 대답을 못 한 거라는 걸까. 숨소리만 들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욕실에서 쓰러지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느샌가 집이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물소리가 멈췄다.
‘쓰러지진 않았나 보네.’
끝도 없는 제 상상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다. 끼익, 뒤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한껏 몸을 움츠린 혜린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땐, 욕실에서 나온 재윤이 서 있었다.
하얀 목욕 가운을 걸친 재윤의 젖은 머리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고, 느슨하게 묶은 허리띠 탓에 벌어진 틈새로 그의 탄탄한 가슴께가 보였다. 젖은 속눈썹이 평소보다 짙은 색을 띠었고, 그 너머의 눈동자는 나른한 듯 멍한 느낌으로 저를 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혜린이 아, 외마디를 뱉곤 황급히 눈을 돌렸다.
“미안, 나가려고 했는데…. 그, 주형원이 엄청 취해서 왔길래. 전화했을 때도 답이 없어서…….”
혜린은 변명처럼 느껴지는 말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젠장. 약만 두고 후다닥 나갔어야 했는데, 잠시 멈췄던 게 사달이 났다. 그 말에도 고요한 침묵이 이어져 흘끔흘끔 그의 눈치만 살피기 급급했다. 재윤은 욕실 앞에 그대로 서서 미동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엔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화가 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가 풍기는 미묘한 위압감이 혜린을 심적으로 내리눌렀다. 그 탓에 잔뜩 위축된 혜린이 고개를 떨구곤 괜히 손톱을 튕기었다.
“마음대로 들어와서… 미안해. 나는 걱정이 돼서…….”
“.......”
화가 많이 난 걸까. 하긴 허락도 없이, 이 늦은 시간에 멋대로 집에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낮아진 시야에 때 탄 양말이 보였다. 눈이 녹아 더러운 길 위를 슬리퍼 신고 걸은 탓이었다.
더럽다. 지금 그의 공간을 더럽힌 건가. 저를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괜히 와서 그를 화나게 했다. 오늘은 가장 행복해야 할 날인데, 다 제가 망쳤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무럭무럭 자라만 갔다. 그간 사실 저를 싫어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얼굴 보기가 두렵기까지 했다.
“식탁에 숙취 해소제 뒀으니까, 꼭 먹고 자.”
혜린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가 볼게. 내가…….”
괜한 짓한 거면 미안해, 라는 말이 시야에 들어온 재윤의 하얀 발과 다리에 삼켜졌다. 몸 앞으로 훅 끼쳐온 비누 향에 후끈한 온기가 실려 왔다.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도마 위 오빠 친구 | 그일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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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윤이 이상한데 다 이유가 있음. 짝사랑과 철벽남, 알고보니 일편단심. 해피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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